폴 고갱

GAUGUIN, Paul

출생 : 1848 년

사망 : 1903 년

국적 : 프랑스 French

활동시기 : 19 세기

폴 고갱은 프랑스의 탈인상주의 화가이다. 파리에서 태어났다.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체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생의 마지막 10여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였고 이 시기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제서야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회화뿐만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의 다방면에서 작품을 남겼다. 고갱의 화풍은 클루아조니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과 어머니 알린 샤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럽에서는 1848년 혁명이 한창이었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당시 34세로 오를레앙에서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다. 클로비스는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어머니 알린은 당시 22세로 인그레이빙 작가였던 앙드레 샤잘과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의 딸이었다. 트리스탕은 앙드레 샤잘의 폭력과 학대 때문에 결별하였다.

폴 고갱의 외할머니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유명한 구호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다.귀족의 사생아였고 그로 인해 페루와 인연이 있던 트리스탕은 혁명 강연을 다니다 보르도에서 1844년 병사하였다. 폴 고갱은 외할머니를 이상화하여 흠모하였으며 그녀의 저술을 평생 가지고 다녔다.

1850년 프랑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클로비스는 장모인 트리스탕의 연줄을 통해 페루에서 언론인 경력을 계속 쌓고자 하였다.클로비스는 가족을 동반하고 여행길에 올랐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페루에는 아내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 그리고 2살 반이었던 누나 마리만이 도착하게 되었다. 다행이 페루에서 알린을 맞이한 외종조부는 차기 대통령직이 확실한 정치인이었고 알린과 식솔을 환대하였다. 훗날 고갱은 페루에서의 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로 회상하였다.

1854년 후견자가 실각하자 알린 가족은 더 이상 페루에 머무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조부인 기욤 고갱이 살고 있는 오를레앙으로 갔다. 그러나 오를레앙은 알린의 어머니와 배다른 귀족 형제인 트리스탕 모스코소 가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었고 알린은 이들의 괴롭힘을 피해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알린은 파리에서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학업과 첫 직업

고갱은 지역의 학교 두어 곳을 옮겨 다니다 명문으로 평가되던 루아레의 라 사펠-상-메스밍에 있는 카톨릭계 신학 소학교로 편입하였다.[8] 고갱은 이 학교에서 3년을 보낸 뒤 파리에 있는 해군 예비학교인 로리올 학원에 입학하였다. 얼마 후 고갱은 다시 오를레앙의 리시 잔 다르크 학교로 편입하여 그곳에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구한 직업은 상선 해병을 위한 도선사이었다. 3년간 도선사 생활을 한 고갱은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2년 동안 복무하였다.1867년 7월 7일 어머니 알린이 사망하였으나 고갱은 누나 마리가 인도까지 달려와 알려주기 전까지 몇 개월 동안 그 소식을 알지 못했다.

1871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증권회사에 취직하였다. 가족과 친한 지인이었던 구스타프 아로사가 마련해 준 자리로 취직 당시 고갱의 나이는 23세였다. 고갱은 성공한 파리지앵 증권 중개인이 되어 11년을 근무하였다. 1879년 고갱의 수입은 연간 3만 프랑으로 2008년 기준으로 환산할 때 12만 5천 달러 정도가 된다. 1억 5천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고갱은 미술품 거래에서도 많은 돈을 벌었다].그러나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면서 그는 더 이상 증권 거래로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었고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결혼
1873년 고갱은 덴마크 출신의 메테-소피 가드(1850년 – 1920년)와 결혼하였다. 이후 10년 동안 살면서 둘은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1884년 가족은 코펜하겐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생계를 위해 방수포 판매를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고갱은 덴마크어를 하지 못했고 덴마크 사람들은 프랑스제 방수포를 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인 가드가 외교관을 위한 프랑스어 수업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떠안았다.

11년간 이어져 오던 중산층의 결혼 생활은 고갱이 전업 화가가 되면서 주저 앉았다. 살림이 급격히 기울자 아내는 고갱에게 떠나달라 요구하였고 고갱은 1885년 파리로 돌아갔다. 부부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891년이었고 1894년에 가드는 결별을 선언하였다.

첫 작품

누드 습작, 1880년, 글립토테크 미술관
증권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873년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파리 9구에 살고 있었는데 근처에 종종 인상파 화가들이 모이는 카페가 있었다.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와 친분을 맺고 이들과 어울렸다. 고갱은 일요일에 피사로를 방문하여 채소밭에서 그림을 그렸다. 1877년 고갱은 "다리를 건너 빈곤층이 사는 신시가"인 보지라르 구역에 화실이 딸린 집을 마련하고 이사하였다. 그는 여기서 전직 증권 중계인이자 화가로 전업한 에밀 슈페네커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고갱은 《보지라르의 채소밭》과 같은 그림을 1881년과 1882년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나 멸시를 당하였다. 오늘날 이 그림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882년 주식시장 붕괴는 미술시장 역시 위축시켰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취급하던 아트딜러 가운데 가장 큰 손이었던 폴 뒤랑 루엘 역시 큰 타격을 입었고 고갱과 같은 신규 작가의 작품을 구입할 여력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갱은 2년간 전속 계약을 맺고 작업하였으며 느리긴 하지만 차츰 인지도를 쌓게 되었다. 2년 동안 고갱을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였으며 간간히 폴 세잔과도 작업하였다. 1883년 10월 폴 고갱은 피사로에게 자신이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전업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니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듬해 1월 고갱은 가족들과 함께 루앙으로 이사하였다. 루앙은 파리보다 집값이 싸지만 멀지는 않아서 고갱은 여름이 오면 피사로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험은 그해말 메테가 아이들을 데리고 코펜하겐으로 가면서 끝났다. 고갱은 1884년 11월 자신의 작품과 도구를 코펜하겐으로 보내고 곧이어 자신도 아내에게 갔다. 이때 보낸 작품들 몇 점은 아직도 코펜하겐에 소장되어 있다. 앞서 서술한 것 처럼 그들의 코펜하겐 삶은 녹녹치 않았고 1년여 만에 고갱은 파리로 돌아갔다.

프랑스 시기 1885년 – 1886년
고갱은 6살난 아들 클로비스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다른 아이들은 코펜하겐에서 메테가 키웠다. 파리의 미술계는 다시 돌아온 고갱을 반기지 않았다. 겨울이 닥치자 고갱은 밑바닥 일들을 하며 혹독한 빈곤을 겪었다. 클로비스가 병을 앓게 되자 고갱은 누나 마리의 돈으로 아들을 기숙 학교에 입학시켰다. 1885년 한 해 동안 고갱은 몇 점 밖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1886년 8회차이자 마지막이었던 인상파 전람회에 고갱은 19 점의 그림과 목판화를 출품하였다.이 때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루앙이나 코펜하겐에서 그린 것으로 새로 작업한 것이라곤 예전에 그렸던 《목욕하는 여인》의 누드 위로 옷을 덧입힌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릭스 브라크몽이 고갱의 작품 하나를 샀다. 이 전시회는 당대 아방가르드의 선두로 평가받던 조르주 쇠라의 작품도 전시하였는데 고갱은 쉬라의 신인상주의니 점묘법이니 하는 것을 경멸하였다. 이는 인상주의 전람회를 주선하고 쉬라를 초대한 피사로와 의견 대립으로 이어졌고 결국 둘은 절교하였다.[

고갱은 1886년 여름을 브르타뉴반도의 퐁타벤에서 보냈다. 고갱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무엇보다 물가가 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이곳에 젊은 화가들이 몰려든다는 것을 알아챘다. 고갱은 다혈질에 권투와 펜싱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이 느긋한 휴양지에서 새로운 친분을 쌓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 시기 고갱은 주로 풍경화를 그렸다. 퐁타벤의 화가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찰스 라발로 고갱에게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의 이국적 풍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즐겼다.

이 여름에 고갱은 제8차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하였던 피사로 화풍의 누드화를 찢어버리고 대신 《브르타뉴의 양치는 소녀》와 같은 풍경화를 그렸다. 당시 퐁타벤에는 영국의 랜돌프 칼데콧이 그린 삽화를 사용한 브르타뉴 여행 안내서가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고갱은 이 안내서의 그림들을 의도적으로 따라 그렸다. 그러면서 새로 사귄 화가들 처럼 자신의 작품도 보다 원색을 많이 쓰는 화풍으로 변화를 시도하면서 브르타뉴 지역의 소녀를 소재로한 그림들을 그렸다. 이때의 습작들은 나중에 파리로 돌아와 《네 명의 브르타뉴 여성》과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바탕이 되었다.

고갱은 라발의 권유대로 파나마와 마르티니크를 여행하였고, 여행 뒤엔 다시 찰스 라발, 에밀 베르나르, 에밀 슈페네커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과 함께 퐁타벤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상징주의를 내세우고 퐁타벤 화파를 결성하였다. 고갱은 유럽의 전통적 화풍, 특히 인상주의가 상징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부족하다고 여겼고 아프리카와 동양의 미술이 갖는 강렬함에 끌렸다. 당시 유럽에선 특히 일본의 채색판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1889년 벨기에의 화가 스무명이 결성한 레 베(프랑스어: Les XX, 20}}는 고갱의 개인전을 열었다.


고갱은 민속 예술과 우키요에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클루아조니즘에 동참하였다. 클루아조니즘은 미술 평론가 에두아르 뒤자르댕이 에밀 베르나르의 작품을 평하면서 단색의 평평한 여백과 외곽선의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화풍을 중세의 칠보(cloisonné) 공예에 빗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갱은 베르나르의 화풍이 그동안 찾아 헤매던 바로 그것이라고 느꼈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갱은 1889년 《황색의 그리스도》를 그리면서 클루아조니즘의 정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색상은 보다 원색적으로 표현되었고 두터운 외곽선으로 경계를 뚜렷하게 남겼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 고갱은 전통적인 그라디에이션으로 명암을 나타냈기 때문에 외곽선으로 둘러쌓인 대상은 마치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처럼 보였다.고갱은 자신의 화풍을 더욱 밀어붙여 종합주의로 발전시켰다. 종합주의는 화면을 구성하는 각각의 색이 모두 동등한 역할을 맡아 어느 하나가 주되고 다른 것은 부수적인 것을 거부하는 사조이다.

  • 전체
  • 그림
  • 조각
  • 삽화
The Seine at the Pont d'Iéna, Snowy Weather
The Seine in Paris between the Pont d'Iéna and Pont de Grenelle
The Market Gardens at Vaugirard
Study of a Nude (Suzanne Sewing)
Interior of the Artist's Home, Rue Carcel
Sleeping Boy (Émile Gauguin)
The Sculptor Aubé and His Son
The Garden in Winter, Rue Carcel
Madame Mette Gauguin
Gauguin at His Easel
Still-Life with Mandoline
Still-Life with Horse's Head
The Beach at Dieppe
Watering
Still-Life with Portrait of Laval
Four Breton Women Dancing
Tropical Vegetation, Martinique
By the Pond
Picking Mangoes
Two Girls Bathing
Breton Boys Bathing
Winter Landscape, Snow Effect
Still-Life with Three Puppies
Vision after the Sermon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Breton Girls Dancing
Portrait of Madeleine Bernard
Washerwomen
Still-Life, Fête Gloanec
Haymaking in Brittany
The Schuffenecker Family
The Ham
In the Waves (Ondine)
The Seaweed Harvesters
Breton Girls by the Sea
Caribbean Woman with Sunflowers
Breton Landscape: The Willow
The Yellow Christ
The Green Christ or The Calvary
Self-Portrait with Yellow Christ
Christ in the Garden of Olives
Self-Portrait
Bonjour, Monsieur Gauguin
La Belle Angèle
La Belle Angèle (detail)
Landscape with Two Breton Women
The Yellow Haystacks (The Blond Harvest)
Woman in front of a Still-Life by Cézanne
Nirvana, Portrait of Meyer de Haan
Night Café at Arles (Madame Ginoux)
Van Gogh Painting Sunflowers
In the Garden of the Hospital at Arles
The Alyscamps at Arles
Grape Harvest at Arles (Human Anguish)
Above the Abyss
Blue Trees
Ia Orana Maria (Hail Mary)
Ia Orana Maria (detail)
The Meal (The Bananas)
Woman with Flower (Vahine No te Tiare)
Sulky Woman or The Si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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